나선도서관에서 듣는 언러닝스페이스 라디오: 포스트 네이쳐 리스닝 세션 <살아있는 물, 아구아 비바>
2024년 여름 제주에서의 언러닝스페이스 라디오 레지던시의 여운을 나누었다. 이번 리스닝 세션 <살아있는 몸, 아구아 비바>는 제주에 다녀간 분들이 남기고 간 파도, 바람, 풀벌레 소리부터 에세이와 낭독까지, 느슨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된 오디오 에세이 트랙들을 하나의 앨범처럼 들어본다.
이 순간에 온전히 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쉼은 공존에 대한 깊은 차원의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하이퍼객체, 티머시 모턴, 410p
트랙 리스트
1. 김지승 – 살아있는 물
무더운 올 여름, 바람이 파도처럼 불던 날 제주에서 여성적 글쓰기와 다양한 여성 서사로 관계맺은 김지승과 메두사 클럽 친구들이 각자 또 함께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아구아 비바를 낭독한다.
2. 고닥 x 요하네스 말파티 – Bounces 5’51”
고닥과 요하네스 말파티는 얼린 바닷물을 LP 턴테이블로 읽어내는 실험으로,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나드는 물의 몸을 청각화한다.
3. 공영선 – 2분 10초 2’10”
움직임 기술 - 구술이 청자의 신체로 반영되는 과정이 '경계없이, 형체없이 끝없이 변모하고 포용하는' 아구아 비바의 상태와 닮아있었다. 감각적 경험으로써의 '무용(혹은 무엇)'을 쫓으며 떠올리는 상상과 감각의 성질이 '살아있는 물'과도 같지 않을까.
4. 신현정 – 경계에서 쉬기 6’30”
제주 하도리에 머물며 몸으로 만난 바다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코어이자 메세지, 친밀한 말걸기, 그리고 속삭임이다. 살아있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곳에서, 저절로 열린 침묵을 만나고 현존의 경험들을 충분히 쌓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역동적인 하늘과 가차없이 뜨거운 태양, 검은 돌들과 모래,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도, 바람이 낭만적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직접 바다를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바다를 유영하는 것은 마치 몸에 새겨진 또다른 확장된 감각처럼 느껴지고 물과 몸 사이의 경계는 자주 흐려진다. 매일 바다에, 마치 순례하듯이 몸과 물에 대한 신뢰감을 경험하고 쌓아간다. 점점 더 긴장을 풀고 자신의 몸을 바다에 내맡기며 하나의 움직임이 된다, 마치 해파리처럼.
5. 장희진 – Necromance 4’22”
물을 무서워하는 공포감에 얽힌 죽음의 기억을 출발점으로, 물을 둘러싼 강렬한 감정과 생명을 되살리는 강령술 의식을 소리로 형상화한다.
6. t33g33 (알리아나 카브랄) – Goddess Rituals (Jeju Island Mix) 38’32”
필리핀에서 제주로, 섬에서 섬으로 물에 잠긴 여성과 신화를 연결한다. 수집한 자연 소리와 에세이, 아구아비바의 낭독 등을 결합하여, 청각적 기억으로 재구성한다.
7. 이한범 – 방향 없는 파도
끊임없이 변하는 파도의 무작위적이면서도 반복적인 리듬에 귀 기울이며, 물의 존재 방식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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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
일주일의 시간이 내게 주어지자, 나는 이 시간을 오직 파도 소리를 듣는 것에 할애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파도 소리에는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2022년 아이슬란드에 다녀오고 나서부터였다. 내가 남부 해안가를 돌아보고 올 예정이라고 하자, 그곳에서 만난 화가 스반보르그는 내게 진지하게 경고해 주었다. 아이슬란드의 남부 해안에 치는 파도는 남극에서부터 어떠한 땅에도 부딪치지 않고 올라온 것이라 매우 매서우니 조심하라고. 나 는 그 말이 무척 동화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안가에 가서 내가 들었던 파도의 소리는, 정말 로 까마득한 먼 바다에서부터 상상할 수 없이 머나먼 길을 지나온 뒤 그 모든 시간 동안 머금었 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처럼 들렸다. 문명의 어떤 기술도 이런 압축과 해제의 능력을 가지고 있 을 것 같지 않았다. 지층을 울리는 낮은 진동부터 이 반짝이듯 부서지는 높고 짧은 진동들, 하 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고, 반복되는 파도 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후로 나는 파도가 무엇인지 궁금해했 고 점점 더 그게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일주일동안 파도 소리만 들으면 파도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은 커녕 한달 일년이 주어져도 파도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파도에 대해서 알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방식이 상당히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했다. 무언가를 듣는다는 관념과 안다는 관념이 어디서부터 잘못 결속되어 있는지 생각했다. 상당한 좌절감이 찾아왔다.
다만, 어떤 소리를 듣고 나자 다른 어떤 소리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파도는 보통은 규칙적이어서 소리 또한 규칙적이다. 한동안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 지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문득 방향 없이 몰려오는 파도의 소리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며칠간 하염없이 해안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여러 방향에서 파도가 치는 해안가를 발견했다. 적어도 서너 방향의 물길이 있었고, 그곳의 파도 소리를 녹음했다. 서울로 돌아와 나는 일주일동안 녹음한 소리 중 이 파일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지웠다. 그렇다고 이 파도의 소리가 어떤 유의미한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파도 소리에 다가가려 했던 일이 실패한 경험에 대해 남겨둔 기억에 가깝다. 파도 소리란 뭘까? 방향 없는 파도 소리는 파도 소리와 불화하는 걸까? 내가 너무 헛된 것을 생각하는걸까?
서울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날 지금은 이름을 잊은 붉은 오름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가벼운 몸으로. 갑자기 바람이 불었고, 파도 소리가 났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깊은 숲의 한가운데서 방향 없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다시 산을 올라갈까, 마저 내려 갈까 고민하다가 천천히 걸었다.
이한범
🐚나선도서관에서 듣는 언러닝스페이스 라디오
포스트네이쳐 리스닝세션 <살아있는 몸, 아구아 비바>
🌊 Rasun Library x Unlearning Space Radio: Postnatural Listening Session <Living Body, Água Viva>
참여 작가: 장희진, 이한범, 신현정, t33g33 (알리아나 카브랄), 고닥x요하네스 말파티, 김지승, 공영선
주최: 언러닝스페이스
협력: 나선 도서관
후원: 제주문화재단, 제주특별자치도 국제예술교류지원사업